[창간1주년 특집] 진주신문 창시자, 고(故) 박노정 선생을 기리다 (1950.03~2018.07)
[창간1주년 특집] 진주신문 창시자, 고(故) 박노정 선생을 기리다 (1950.03~2018.07)
  • 최하늘 기자
  • 승인 2018.08.27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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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노정 선생

시민사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된 고 박 노정 선생은 언론인으로 시민운동가로 시인으로 살아온 분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온화했고, 불의에는 누구보다 강경했던 그였다.

진주 출생인 박노정 시인은 1990년 3월 3일 '시민주'로 만들어진 옛 <진주신문> 창간에 힘써온 분으로써 이후 12년 동안 편집·발행인으로 애썼고, 풀뿌리 지역 언론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고 박 노정 선생은 불의에 엄격하신 분이었다. 지방언론이 정론직필하기 위해선 지역사회가 바로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진주정신’을 찾고자 애쓴 박노정 선생은 그렇게 진주의 시민운동가로서, 진주의 언론인으로서 진주의 강직한 시인으로서 사명감을 다하고 떠났다.<편집자 주>

 

 

 

△ 시민운동가로서의 박노정

고인 박 노정 선생은 지역이 잘 되기 위해 먼저 언론부터가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역사회에 건강한 여론 조성과 감시자 역할에 앞장 섰다.

그러다 보니 진주에 있는 진주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진주시민연대, 진주시민단체협의회, 형평운동기념사업회 등 거의 모든 시민단체 대표를 한 번씩은 맡았다.

한편으로는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임을 널리 알렸고, ‘진주정신’을 찾고자 애썼다. 선생이 남긴 유명한 일화는 진주성 의기사 ‘논개 영정’이 친일 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을 때였다.

그는 2005년 5월 그가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을 때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 (일명 논개영정)그림을 떼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지만 “벌금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처럼 이 역사적 사건은 불의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성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당시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친일화가가 그린 논개 영정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후 의기사에는 논개 표준영정이 봉안됐다. 하지만 선생은 5만 원권 신사임당 그림을 비롯해 전국에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가 많은데도 아직 그대로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을 항상 표시해왔다.

당시 진주신문 창간호를 시작으로 함께 일해 온 초창기 일부 멤버들은 박노정 선생에 대해 “평소에는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으나 부당하거나 부조리한 일에는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며 “스스로는 가난하여 가진 것 없으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고 전했다.

△ 언론인으로서의 박노정

박 노정 선생은 강직한 언론인으로서도 역할을 해오신 분이다.

당시 시민들은 민주화 운동 이 후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지역신문의 발간을 염원했다.

이 같은 시민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진주 최초의 시민들이 주주로 창간된 신문인 <진주신문>이 발간됐으며, 동시에 시민들의 단합과 민심도 보여준 계기가 됐다 .

당시 <진주신문>을 통해 진주농민항쟁, 계사년의 진주성 전투, 남명사상, 형평운동 등의 사건은 새롭게 부각되었고, 시민사회에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게 됐다.

이처럼 최초의 진주신문은 권력과 토호세력을 견제하려는 취지로 언론인 박노정 선생과 함께 1990년 3월 3일 첫 주간신문으로 창간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고인 박노정 선생은 창간 때부터 초대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을 겸했다. 그는 1989년 2002년까지 12년간 역임하면서 대쪽 같은 기개로 진주정신의 구현을 위해 앞장선 위대한 인물이다.

△ 시인으로서의 박노정

고인 박노정 선생은 문학과 하나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 박노정 선생은 1975년 제대 후 추운 겨울, 산으로 들어가 십 몇 년에 이르는 참선 공부와 삶에 대한 탐구, 자연생활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시와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인 박노정 선생은 결국 삶은 '자연과 문학과 삶의 하나 됨'이라는 데 눈 뜰 무렵 결혼 후 속세로 나오게 된다.

그는 지난 1981년 등단해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 <늪이고 노래며 사랑이던>, <눈물공양>, <운주사> 등을 펴내게 된다.

시집을 내는 동안 진주 민족예술인상, 개척언론인상, 경남문학상, 호서문학상, 토지문학제 하동문학상 등을 받기도 했으며, 진주문인협회장과 진주가을문예운영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한다.

또 2017년 6월 경남지역 시인 11인과 고 노무현 서거 8주기 기념 추모시모음집 '물처럼 물을 건너, 바람처럼 바람을 건너'를 펴내기도 했다.

이렇듯 박 노정 선생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시민운동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지역 시민사회의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분이었다. 그는 향년 69세 나이로 오랜 병마와 투병 중 지난 7월 7일 산청군 차황면 가족묘지 배롱나무 아래 묻혔다.

(사진, 자료제공-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