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쉽게 읽는 남명정신
[기고] 쉽게 읽는 남명정신
  • 박태갑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사무처장
  • 승인 2020.11.0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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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갑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사무처장.
박태갑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사무처장.

남명사상이 현대에 꼭 필요한 정신으로 다시 세상을 깨우고 있다. 지난 40여년 학계와 문중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 오던 남명연구와 선양사업이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출범이후 국도비 지원과 경남도의 기구설립 및 조례제정 등 체계가 갖춰지고 초중고교생은 물론 공무원과 교직원의 선비문화체험연수가 줄을 잇고 있어 이제야 비로소 400여년 역사에 묻혀 있던 남명사상의 발현에 서광이 비치는 듯 하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의 국민들은 안타깝게도 퇴계와 율곡 등에 비해 남명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상소로 평가받는 남명의 단성소가 발견된 이래 학계의 뜨거운 관심과 빛나는 노력은 불과 40여년만에 2천여편에 이르는 남명사상연구를 쏟아내고 있으나 국민저변층이 남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절실해 보이는 이유다.

이제 남명을 전공하거나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실과 고증을 통해 남명사상에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와 동시에 남명이 누구이며 왜 그동안 몰랐는지, 다른 선비와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과연 현대에 배우고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남명이 일평생 위기지학을 통해 구현한 경의정신은 마땅히 우리가 배워야 할 위대한 덕목이지만 너무 어려운 고전으로 인식하게 하면 전통을 고루하게 여기는 세대에게 결코 교훈과 감동으로 남을 수 없기에 남명정신에 대한 대중적인 의문을 중심으로 쉽고 친절하게 요약해 보고자 한다.

남명과 퇴계는 1501년에 출생하여 퇴계는 1570년 남명은 1572년에 돌아가셨다. 율곡은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돌아가셨으니 세분 모두 16세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다.

남명은 퇴계,율곡과 달리 4대사화로 얼룩진 암울한 정치를 뒤로 하고 과거공부가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학문에 침잠하여 현실을 바로 보는 혜안을 가지게 되었고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왕과 조정의 혁신을 위해 목숨을 건 상소를 이어 나갔다.

명종재임 시 단성현감의 벼슬을 제수받고 올린 을묘사직소(일명,단성소)에서는 왕을 고아로 최고실권자인 대비를 과부로 표현하며 조정의 무능과 부패를 극렬하게 일갈하였고, 선조임금 시 올린 무진봉사는 재정을 출납하는 관리들의 폐단과 부패를 조목조목 밝히고 혁파를 주장한 바 이는 서리망국론으로 불리며 이후 306년 동안 조정에서 부정부패를 경계하며 인용해 왔다.

같은 해 퇴계도 선조에게 무진봉사를 올려 시무6개조를 건의했으나 후대의 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관념적인 글로 남명의 무진봉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비교 서술한다. 이처럼 남명은 배운 바를 실천하기 위해 그 어떤 선비도 감히 하지 못할 직언을 서슴치 않으며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명의 그러한 기개와 실천사상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임진왜란 발발 시 그의 제자 50여명이 글 읽는 선비의 몸으로 모두 의병장이 되어 수많은 전과를 세우고 국난을 극복하는 원천이 된 바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세계사에서조차 그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

첫째는 다른 문하의 의병활동은 미미하거나 아까운 목숨을 버리는 형태에 머무른 것에 비하여 남명의 제자 의병장들은 승전을 이어갔고, 둘째는 선생의 사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발발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모두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전재산을 털어 의병을 규합하여 전선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중기 주자학 위주의 주류학풍을 벗어났다는 오해와 이단취급을 받으면서도 제자들에게 천문지리, 병법, 의서 등을 가르친 남명의 혜안과 함께 사후 2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제자들의 가슴에 실천정신에 대한 굳은 의지를 심어 준 선생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새삼 짐작케 한다.

또한 선생이 남긴 작품인 민암부를 보면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늘 마음 아파하면서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 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이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펴 정치와 권력이 진정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남명, 퇴계, 율곡 세분은 모두 선조임금 때 돌아가셨다. 선조는 남명에게만 사제문을 내렸다.

“소자는 이제 누구를 의지하며, 백성들은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까!” 임금이 남명에게 자신을 소자라고 칭하는 최고의 존경이 과하지 않을 만큼 조선 중기 남명은 선비사회의 한줄기 밝은 빛이자 사상의 중심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남명정신이 왜 그토록 오래 묻혀 있었을까!

1608년 구국의 주체로서 남명의 제자들은 광해임금과 함께 15년간 정치의 전면에 서서 명청교체기 실리외교, 자주국방, 대동법과 호패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 등 전란수습과 민생안정에 박차를 가해 나왔다.

그러나 1623년 또 다른 정치세력은 친명반청이라는 황당한 명분하에 이른 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를 내치고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의 제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으며 400여년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인고의 세월을 거쳐 마침내 40여년전 고려대 동양철학과 고 김충렬 교수의 단성소 발견을 계기로 남명이 다시 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명의 사상과 실천정신은 대부분 성리학적인 관심과 연구에 치중했던 다른 선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패한 절대권력에 맞서는 진정한 용기, 지식의 사회적 실천, 공무원의 청렴, 주권재민, 실사구시 등 4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이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에게 더욱 요구되는 덕목이며 향후 행복하고 맑은 사회를 지향해 나가기 위한 우리나라의 중심사상과 정신이 될 것이라고 본다.